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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도어 폰 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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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도어 폰 보크는 프로이센 왕국에서 태어난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침공, 서부 전격전, 바르바로사 작전 등 주요 작전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특히,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B집단군 사령관으로 파리 입성을 이끌어 육군 원수로 승진했지만, 모스크바 공략 실패와 작전 지휘 문제로 히틀러와 갈등을 빚어 여러 차례 해임되었다. 1945년 5월, 연합국과의 정전 교섭 임무를 맡던 중 영국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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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도어 폰 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1939년의 페도어 폰 보크 (Generaloberst 당시)
1939년, 상급대장 시절의 보크
본명모리츠 알브레히트 프란츠 프리드리히 페도어 폰 보크
별칭퀴스트린의 성화
데어 슈테르버 (Der Sterber)
출생일1880년 12월 3일
출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주 퀴스트린
(현재 폴란드, 코스트신나트오드롱)
사망일1945년 5월 4일
사망지나치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대관구, 올덴부르크인홀슈타인
묻힌 곳렌스안 묘지
배우자말리 로니 안나 마르가 클라라 폰 라이헨바흐 (1905년 결혼, 1910년 사망)
빌헬미네 고트리베 예니 폰 보디엔 (1936년 결혼, 1945년 사망)
자녀1명
친척에리히 폰 팔켄하인 (삼촌)
오이겐 폰 팔켄하인 (삼촌)
페도어 폰 보크 서명
서명
군사 경력
소속독일 제국 육군 (1898년–1918년)
프로이센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1918년–1933년)
독일 육군 (국방군) (1933년–1942년)
복무 기간1898년–1942년
최종 계급[[파일:WMacht H OF10 GenFeldmarschall01 h 1942.svg|40px]] 육군 원수
지휘국방군
제2 (경) 대대, 제4 프로이센 보병 연대 (1924년)
제4 프로이센 보병 연대 (1926년)
제1 기병 사단
군관구 II (1931년)
국방군
제3 집단군 사령부 (1935년)
제1 집단군 사령부 (1938년)
북부 집단군 (1939년 8월)
B 집단군 (1939년 10월)
중앙 집단군 (1941년 10월)
남부 집단군 (1942년 1월)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
독일 춘계 공세 (1918년)
동부 전선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 (1915년)
브루실로프 공세 (1916년)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그디니아 전투 (1939년)
서부 전선
네덜란드 전투
마스트리흐트 전투 (1940년)
벨기에 전투
리스 전투 (1940년)
프랑스 전투
됭케르크 전투 (1940년)
동부 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1941년)
스몰렌스크 전투 (1941년)
옐냐 공세 (1941년)
모스크바 전투 (1941년)
르제프 전투 (1942년)
청색 작전
수상푸르 르 메리트 훈장
기사 철십자 훈장

2. 생애

프로이센 왕국의 퀴스트린(Küstrin, 현재의 폴란드 코스트신나트오드롱)에서 태어난 보크는 1898년 제5근위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모장교로 종군하여 1918년 4월 프로이센 최고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대전 후에도 군비가 제한된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남았다.

1929년 2월 1일 소장, 1931년 2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2월 제II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33년 나치당 집권 후에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고, 1935년 3월 1일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제8군 사령관으로서 오스트리아에 진주했으며, 같은 해 3월 상급 대장으로 진급했다. 11월에는 제1군집단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 26일 북방군집단 사령관이 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폴란드 침공에서 북부 집단군 사령관을 맡았고, 1940년 서방전격전에서는 B집단군 사령관으로 참전, 그 공로로 같은 해 7월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서 민스크, 스몰렌스크를 공략, 12월에는 예하 부대가 모스크바 정면 30km까지 육박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격과 혹한으로 독일군 공격이 둔화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그 책임을 물어 보크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1942년 1월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병사하자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여름 공세 작전 지휘를 두고 히틀러와 다시 대립하여 7월에 해임되었다. 이후 예비역으로 재편되어 현역 복귀는 하지 못했다.

1945년 4월 히틀러 사후, 칼 되니츠 해군 원수의 요청으로 연합국과의 정전 교섭 임무를 맡았으나, 1945년 5월 3일 영국 전투기의 기총 사격으로 중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했다.

보크는 폴란드 침공 작전 이후 히틀러의 방침에 따른 민간인 대량 학살에 반대했으며, 조카 헤닝 폰 트레슈코프의 반 히틀러 활동 참가 제의를 거절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프로이센 왕국의 퀴스트린(현재 폴란드코스트신나트오드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모리츠는 육군 소장이었으며, 보불 전쟁에는 사단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세당 전투에서의 용맹함으로 표창을 받았다. 증조부는 프리드리히 대왕 치세의 프로이센 육군에서 근무했고, 조부는 1806년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가했다. 어머니 올가 헬레네 프란치스카는 팔켄하인 남작가의 영애였으며, 참모총장을 지낸 에리히 폰 팔켄하인의 여동생이었다.

8세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포츠담과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현대 언어, 수학, 역사 등이 특기 과목이었으며, 프랑스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했다.

1898년 3월 15일,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1905년에 대대 부관으로 취임했다. 1907년에는 연대 부관이 되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참모 교육을 받고 참모본부에 배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모 장교로 참전하여 1916년에 소령으로 진급했고, 1918년 4월에는 프로이센 최고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2. 2. 전간기

1898년 제5근위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한 보크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참모장교로 종군하여 1918년 4월에는 프로이센 최고위 훈장인 프루-르-메리트 훈장을 받았다.[4] 대전 후에도 군비 제한을 당한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남았다.

1920년대 초, 육군 사령관 한스 폰 젝트 장군은 보크를 소위 검은 국방군으로 알려지게 된 조직을 구축하는 임무를 맡은 그룹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이 조직은 "노동 대대"(Arbeitskommandos|아르바이츠코만도스de)로 구성되었으며, 표면적으로는 국방군 부대에 소속된 민간 자원 봉사자로 구성되었지만, 그 구성원들은 국방군 군복을 입고 훈련과 명령을 받았다. 이 조직의 실제 목적은 독일의 군대를 10만 명으로 제한한 베르사유 조약의 제한을 국방군이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보크는 브루노 에른스트 부크루커 소령을 선택하여 Arbeitskommandos|아르바이츠코만도스de를 구축하게 했다.[5]

부크루커 휘하의 검은 국방군은 무기 비축 위치나 구성원들의 이름을 밝히는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페메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의 재판에서 검사들은 보크의 그룹 출신 장교들이 살인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 [피고인]은 그에게 주어진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며, 확실히 폰 보크 대령과 아마도 ... 젝트 장군이 그와 함께 피고석에 앉아야 한다."라고 썼다.[5]

보크는 여러 차례 법정에서 국방부 장관이 "검은 국방군"과 그들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부인했다.[5]

1923년 9월 27일, 부크루커는 쿠데타의 첫 번째 준비 단계로 검은 국방군 4,500명에게 베를린 외곽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부크루커와 국방군의 연락 책임자였던 보크는 분노했고, 격렬한 회의에서 부크루커에게 명령 없이 검은 국방군을 동원한 것에 대해 질책했다.[5] 보크는 국방군은 부크루커의 쿠데타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시 동원 해제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부크루커는 1923년 10월 1일 퀴스트린 폭동을 감행했지만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5] 폭동 이후, 젝트는 검은 국방군을 해체했다.[5]

1935년, 아돌프 히틀러는 보크를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독일 재무장의 일환으로 히틀러가 군대를 재편성했을 때 그의 자리에서 해임되지 않은 장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왕당파로 남았다. 히틀러는 그에 대해 "보크 외에는 아무도 군인들에게 죽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6] 1936년 보크는 빌헬미네 폰 보디엔(Wilhelmine, née von Boddien, 1893–1945)과 결혼했다.

보크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의 합병(Anschluss) 당시 제8군을 이끌고 비엔나로 진격했으며,[7] 같은 해 수데텐란트 병합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8]

3. 제2차 세계 대전

1898년 제5근위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모장교로 종군, 1918년 4월에는 프로이센 최고 프루-르-메리트 훈장(Pour le Mérite)을 수상했다. 대전 후에도 군비 제한을 받은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남았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폴란드 침공에서 북부 집단군 사령관, 1940년 서방전격전에서는 B집단군사령관으로 참전, 같은 해 7월 육군원수로 승진했다.[17]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중부집단군사령관으로서 민스크, 스몰렌스크를 공략, 12월에는 예하부대가 모스크바 정면 30km까지 육박했으나, 소련군의 반격과 추위로 인해 독일군 공격은 둔화,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해임되었다.

1942년 1월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뇌졸중으로 사망하자,[14]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5월, 제2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소련군 공세를 격퇴하고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같은 해 여름 공세 작전지휘를 두고 히틀러와 대립하여 7월에 다시 해임되었다.

1945년 4월 히틀러 자살 후, 칼 되니츠 해군 원수가 제국 대통령이 되었다. 되니츠는 연합국과의 정전 협상을 위해 보크에게 임무를 맡겼으나, 1945년 5월 3일 킬 근교에서 영국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중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했다.[16]

3. 1. 폴란드 침공 (1939년)

1939년 8월 25일, 보크는 폴란드 침공을 위해 북부 집단군을 지휘했다. 북부 집단군의 목표는 비스툴라 강 북쪽의 폴란드군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북부 집단군은 게오르크 폰 큌러의 제3군과 귄터 폰 클루게의 제4군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각각 동프로이센에서 남쪽으로, 폴란드 회랑 기지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공격했다.[17]

보크는 9월 10일 자신의 지휘 하에 있는 부대에게 전선 뒤에 위치한 폴란드 마을에서 총격을 받으면 해당 마을을 불태우도록 명령했고, "어디에서 총격이 가해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17] 군사 점령이 끝난 1939년 10월 26일까지 폴란드 전역에서 531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다.[17] 5주 만에 폴란드는 독일군과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7]

3. 2. 프랑스 침공 (1940년)

1939년 10월 12일, 폴란드 정복 직후 보크는 3개의 기갑사단을 포함한 29½개 사단으로 구성된 B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7] B 집단군은 저지대 국가를 통과하여 진격하고 연합군 부대의 북부 부대를 포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제18군과 제6군으로 구성되었다. 1940년 5월, 그의 부대가 네덜란드를 점령하는 동안 보크는 망명한 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도른에서 만나려 했지만, 거주지를 경비하는 독일군이 그러한 방문을 막도록 지시받아 들어갈 수 없었다.

보크는 1940년 6월 말 프랑스와의 휴전에 참여했다.[17] 1940년 7월 19일, 육군 원수로 진급했으며,[17] 8월 말에는 육군 최고 사령부가 B 집단군을 동프로이센으로 이동시켰다. 여기에는 클루게의 제4군도 포함되었다. 9월 11일, 보크는 프랑스 주둔 지역의 지휘권을 빌헬름 리터 폰 립 원수에게 넘겼다.[17]

3. 3.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1941년 4월 1일, B 집단군은 중앙 집단군으로 재지정되었다.[10] 폴란드에 배치된 중앙 집단군은 소련 침공을 이끌 세 개의 군대 중 하나로, 4군과 제9군, 제3 및 제2 기갑군 그리고 공군 제2군이 포함되었다. 보크의 중앙 집단군 좌익에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지휘하는 북부 집단군이, 우익에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지휘하는 남부 집단군이 있었다.

중앙 집단군의 주요 목표는 프리피야트 늪지대 북쪽 경로를 따라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국경 전투 이후에는 민스크스몰렌스크로 진격하여 그곳에 주둔한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1941년 6월 22일 03시 15분, 바르바로사 작전의 첫 발포와 함께 독일은 선전 포고와 함께 소련을 침공했다.[11]

하인츠 구데리안 부대의 일부 병력이 부크강을 건너 브레스트-리토프스크시를 우회했고, 헤르만 호트의 전차는 니먼강의 그로드노로 향했다. 제4군과 제9군의 여러 정찰 부대가 이미 부크강과 데스나강을 건넜다.

07시 00분, 보크는 포젠에서 제13 보병 군단 사령부 근처의 전진 비행장으로 비행하여 에리히 야슈케 소장에게 침공 진행 상황을 보고받았다. 이후 보칼리에 있는 구데리안의 전방 지휘소를 방문하고, 요아힘 레멜젠을 방문하여 전선 보고를 받았다. 부크강 소련 쪽 도로는 전차 무게를 지탱하기에 너무 물렀지만, 침공 첫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소련의 저항은 미미했고 완전한 기습이 달성되어 전 전선에서 빠른 진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헤르만 호트와 보크(왼쪽)는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중 러시아에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둘째 날, 보크는 구스타프 슈미트 소장의 호위를 받으며 부크강을 건넜다. 그날 늦게 소련의 저항이 전 전선에서 굳건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특히 구데리안의 남쪽 측면에서 그러했다. 한편, 호트의 부대는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벨라루스에서 훨씬 수월하게 진격하고 있었다. 중앙 집단군의 진격 첫 이틀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호트의 군대가 너무 빠르게 진격하여 보크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연락하여 민스크를 우회하고 비테브스크로 공격하여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계획 변경이 받아들여졌지만, 히틀러는 민스크 근처의 대규모 소련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곧 번복되었다. 보크는 "민스크 포위는 결정적이지 않다. 게다가 나는 적이 다음 목표인 민스크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곳에 방어군을 집중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일기에 썼다.

보크는 소련군을 우회하고 도보로 진격하는 보병에게 파괴되도록 내버려 둔 채 모스크바를 향해 직접 진격하는 것을 선호했다. 포위가 필요하다면, 전차를 북쪽과 남쪽으로 돌려 더 작은 소련군을 포위하는 대신 다우가바강-드네프르강 유역을 향해 더 큰 포위를 동쪽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이 계획에 반대하며, 러시아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소련군을 포함한 포위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크는 "우리 기갑 부대에 가해진 이 제약으로 성공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라며 격노했다.

그는 주저하며 비테브스크를 향한 진격을 포기하고 포위된 군대를 파괴하는 데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 25일, 보크는 사령부를 포젠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북동쪽으로 약 약 24.14km 떨어진 코브린으로 옮겼다. 6월 30일, 제4군과 제9군이 슬로님 근처에서 만나 수천 명의 소련군을 포위했지만, 많은 소련군이 동쪽으로 탈출했다. 보크는 곧 포위에서 벗어나 동쪽으로의 전면적인 진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다시 보크와 브라우히치 사이에 대립을 일으켰다.

7월 3일, 보크의 부대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하여 구데리안의 전차가 베레지나강을, 호트의 전차가 도나강을 건넜다. 이날은 보크의 부대가 하루 동안 약 160.93km 이상을 이동하며 최장 거리를 기록했다. 4일 후, 구데리안의 전차는 스몰렌스크 앞의 마지막 큰 장애물인 드네프르강을 건넜다. 그러나 구데리안은 귄터 폰 클루게의 명령에 따라 강을 다시 건너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보크는 이 명령을 뒤집었고 구데리안은 강을 다시 건너는 것이 허용되었다. 보크는 클루게의 행동에 대해 최고 사령부에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7월 11일, 보크는 사령부를 다시 베레지나강 근처의 소련 도시인 바리소프로 옮겼다.

B.H. 리델 하트에 따르면,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은 클루게가 1941년 7월 구데리안과의 모스크바 진격을 중단하고 키예프 포위에 전차를 사용하기로 한 이유 중 하나는, 이 변경으로 클루게가 보크 대신 룬트슈테트의 지휘를 받게 되어 "모시기 어려운 사람"인 보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12]

1941년 10월 태풍 작전 중 동부 전선에서 보크


9월 9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보크에게 모스크바 공격을 위한 작전 명령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태풍 작전(Operation Typhoon)은 이 새로운 공격의 암호명이었으며, 9월 30일까지 시작될 예정이었다. 보크는 작전 계획 및 준비를 감독했고, 며칠 후 최고 사령부의 승인을 받았다.

태풍 작전 준비의 일환으로, 중앙 집단군은 병력과 차량을 보충하고 강화하여 3개의 보병 군(제2군(Wehrmacht), 제4군, 제9군)과 3개의 기갑 군(제2 기갑군, 제3 기갑군, 제4 기갑군)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에리히 호프너 대장(Erich Hoepner)이 제4 기갑군을 지휘할 예정이었으며, 앞선 두 기갑군은 호트와 구데리안의 원래 기갑 집단의 산물이었다. 중앙 집단군은 거의 150만 명의 병력으로 바르바로사 작전 시작 당시보다 더 커졌다. 보크는 9월의 나머지 기간 대부분을 강화된 중앙 집단군에 대한 시찰 여행에 보냈으며, 알베르트 케셀링과 함께 모스크바 상공을 비행하기도 했다.

9월 29일, 보크는 아돌프 슈트라우스, 헤르만 호트, 클루게,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 호프너, 구데리안, 케셀링과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주요 작전 계획이 검토되었고, 보크는 겨울이 시작되기 전이자 10월 혁명 기념일에 맞춰 11월 7일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날, 구데리안과 호트의 기갑 부대 공격으로 태풍 작전이 시작되었고, 며칠 후 보병 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최전선 부대와 모스크바 사이의 거리가 150km 미만으로, 보크는 자신의 부대가 3~4주 안에 도시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보크의 부대는 거의 즉시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서 강력한 소련의 저항에 직면했다.

제2 기갑군은 오룔(오렐)과 브랸스크 근처의 중요한 철도 교차로를 공격했고, 호프너의 제4 기갑군은 데스나 강을 건너 깊은 러시아 영토로 진입했다. 한편, 호트의 제3 기갑군은 볼가 강의 르제프를 향해 공격했다.

10월 3일, 구데리안의 부대는 오렐을 점령했고, 이후 모스크바까지 약 약 289.68km 떨어진 포장된 고속도로에 접근했다. 제2 기갑군의 일부 병력은 브랸스크를 우회하여 카라체프로 향하고 있었다. 보크는 구데리안에게 툴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지만, 몇 시간 만에 이 명령은 최고 사령부에 의해 뒤집혔다. 구데리안은 비아즈마와 함께 소련군의 대규모 포위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브랸스크를 공격해야 했다. 보크는 오렐과 툴라 사이 지역에 소련군이 비교적 없으며, 툴라를 몇 시간 안에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보크는 구데리안의 전차를 브랸스크로 돌리는 데 동의했다.

차가운 비가 중앙 집단군 전선의 북부 지역에 내리기 시작했고, 도로는 라스푸티차로 인해 으로 변했다. 전선 전체가 갇혔고, 진흙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차량은 전차 및 기타 궤도 차량이었지만, 이것들은 매우 느린 속도(때로는 하루에 약 3.22km 미만[1])로 움직였고 연료 소비가 급증하여뜩이나 열악한 보급선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1]

날씨가 약간 개선되자 보크의 부대는 브랸스크와 비아즈마 주변의 포위를 계속할 수 있었다. 비아즈마와 브랸스크 주변의 소련군 이중 포위는 바르바로사 작전 시작 이후 가장 큰 소련군 사상자를 냈으며, 약 65만 명의 포로가 잡혔다. 그 후 보크의 중앙 집단군과 마주한 소련군은 더 이상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보크는 조직적인 소련 전쟁 포로에 대한 나치 범죄에 항의한 몇 안 되는 독일 장교 중 한 명이었지만,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지역에서 수감자들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는 거의 취하지 않았다.

날씨는 다시 악화되었고, 도로는 다시 통과할 수 없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9월 30일 이후, 보크는 약 35,000명의 병력, 250대의 전차와 포병, 수백 대의 기타 차량을 잃었고, 그 중 많은 수가 진흙 속에 갇혔다. 연료와 탄약 보급은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지면서 모스크바를 향한 진격은 계속되었다. 제4 기갑군의 선두 부대가 칼루가말로야로슬라베츠에 도달했을 때,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약 64.37km 이내에 있었다. 구데리안의 남부 진격은 훨씬 더 느렸다. 그의 부대가 툴라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상당한 병력과 전차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다른 부대들은 노보모스콥스크와 베니요프를 점령하여 툴라를 우회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보크의 부대가 10월 중순에 모자이스크 방어선에서 붉은 군대 방어선을 돌파하자, 수도에 공황이 닥쳤다.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이 도시에서 대피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은 비상 자원 부대에 징집되었다. 계엄령이 시행되었고, 버려진 상점의 약탈과 강탈이 증가했다. 세묜 티모셴코 원수는 레닌그라드 방어를 조직하고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지휘권을 넘겨졌다. 소련 정부의 주력은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804.67km 떨어진 쿠이비셰프로 대피했지만, 스탈린은 주코프가 수도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킨 후 수도에 남아 있었다.[13]

보크의 부대가 더 멀리 진격할수록 소련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는 끊임없는 러시아 포격으로 인해 구덩이가 생겨 통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독일군을 진흙 속으로 밀어 넣었고, 중앙 집단군은 다시 갇히게 되었다. 10월 중순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하려는 목표는 더 이상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진격의 엄청난 무게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고, 10월 21일 제9군 부대가 칼리닌을 점령했다.

11월이 되자 진흙은 기온이 −28 °C (−20 °F)로 떨어지면서 곧 얼음으로 변했다. 땅이 차량을 지탱할 만큼 충분히 굳어졌지만, 추운 날씨는 많은 군인들이 겨울 옷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고통을 더했다. 동상이 곧 그 피해를 입혔고, 많은 군인들이 심각한 영향을 받아 후송되어야 했다.

11월 20일, 보크는 그의 야전 사령부를 전선 근처의 전진 기지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포병 지휘소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쌍안경을 통해 모스크바의 건물을 볼 수 있었다. 며칠 후, 독일군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건너 힘키에 도달했지만, 소련군의 저항으로 곧 후퇴했다. 11월 29일, 제4 기갑군 일부 병력이 모스크바 서부 교외에 도달했다. 12월 4일, 제2군 부대가 모스크바 서부 교외인 쿤체보에 도달했다. 구데리안 군대의 여러 부대가 콜롬나를 우회하여 모스크바 강에 도달했다. 한편, 제3 기갑군은 다시 한번 힘키로 진입했다. 이것이 보크의 지휘 하에 있던 중앙 집단군이 이룬 마지막 진격이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서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두 명의 독일 군인


12월 6일, 기온이 −45 °C (−50 °F)로 떨어진 가운데, 주코프가 지휘하는 신선한 러시아군이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근처 전선 전체에서 독일군은 후퇴하며 구출할 수 없는 장비를 파괴했다. 며칠 후, 최고 사령부는 모든 공세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보크는 "나는 육군 최고 사령부에 적이 흔들릴 때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항상 요구했다. 우리는 지난 여름에 적을 끝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다. 지난 8월, 모스크바로 가는 길은 열려 있었고, 우리는 승리와 여름 날씨 속에서 볼셰비키 수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조국의 고위 군사 지도부는 지난 8월에 내 군 집단이 방어 태세를 취하도록 강요했을 때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제 우리 모두가 그 실수를 갚고 있다."라고 일기에 썼다.

12월 13일까지 독일군은 수도에서 약 128.75km 이상 후퇴했다. 12월 18일, 보크는 건강 문제로 중앙 집단군 지휘에서 해임되었다.[1]

3. 4.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및 이후 (1942년)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중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민스크, 스몰렌스크를 공략하고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군의 반격과 추위로 인해 해임된 보크는, 1942년 1월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뇌졸중으로 사망하자 남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었다.[14] 1942년 5월, 제2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소련군의 겨울 공세를 격퇴하고 소련군 전차 부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42년 6월 28일, 보크는 쿠르스크 양쪽에서 러시아 전선을 돌파하는 공세를 시작했다. 제2군(바이스), 제4기갑군(호트), 제6군(파울루스) 등 3개 군은 11개 기갑 사단으로 보로네시돈강을 향해 진격했다. 7월 5일, 파울루스의 기갑 사단이 보로네시 양쪽 돈강에 도달했다. 소련 최고 사령부는 니콜라이 바투틴 지휘 하에 보로네시 전선을 창설하고 모스크바에 직접 보고하게 했다. 보크는 독일군의 측면이 너무 깊숙이 들어오기 전에 바투틴의 병력을 제거하려 했으나,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진격을 지연시키는 보크의 계획에 불만을 품었다.

7월 7일,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 집단군B 집단군으로 분할하고, A 집단군은 빌헬름 리스트 원수에게 맡겼다.[14] 7월 17일, 히틀러는 보크를 B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로 교체했다. 보크는 이후 다시는 고위 지휘관 자리를 맡지 못했다.

3. 5. 죽음 (1945년)

1945년 4월,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칼 되니츠 해군 원수가 제국 대통령이 되었다. 되니츠 원수는 연합국과의 정전 협상을 위해 보크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1945년 5월 3일, 보크는 킬 근교에서 탑승했던 차가 영국 전투기의 기총사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했다.[16] 이 공격으로 보크의 아내, 의붓딸, 그리고 친구도 사망했다.

4. 추가 정보

프로이센 왕국의 퀴스트린(Küstrin, 현재의 폴란드 코스트신나트오드롱(Kostrzyn nad Odrą))에서 태어났다. 1898년 제5근위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모장교로 종군하여 1918년 4월에는 프로이센의 최고위 프루-르-메리트 훈장(Pour le Mérite)을 수상했다. 대전 후에도 군비 제한을 당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에 남아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폴란드 침공에서는 북부 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했고, 1940년 서방전격전에서는 B집단군사령관으로 지휘를 맡아 그 전공으로 인해 같은해 7월 육군원수로 승진했다.

1941년 6월 22일에 개시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중부집단군사령관으로서 민스크, 스몰렌스크를 공략해 12월에는 예하부대가 모스크바 정면 30km까지 육박했으나,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과 맹렬한 추위로 인해 독일군의 공격은 둔화되어 그 책임을 물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1942년 1월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병사하자,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여름 공세에 대한 작전지휘를 둘러싸고 또 다시 히틀러와 대립하여 7월에 다시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예비역으로 재편되어 현역으로는 복귀하지 못했으나, 1945년 4월 히틀러의 자살 후 해군 총사령관으로 제국 대통령이 된 칼 되니츠 해군 원수의 요청에 의해 연합국과의 정전교섭의 임무를 맡았으나, 1945년 5월 3일에 키르 근교에서 탑승했던 차가 영국 전투기의 기총사격을 받고 중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했다.

폴란드 침공 작전 이후 히틀러의 방침에 의해 전선 후방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민간인 대량학살에 강력히 반대했었다. 한편 조카였던 헤닝 폰 트레슈코프 육군 소장에게서 반 히틀러 활동에 참가를 타진받았으나 이것을 거절했었다. 1945년 5월, 킬 근교에서 영국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5. 수상 내역

수여일훈장명비고
1911년 9월 13일Königlicher Kronen-Ordende 4등급프로이센
1914년 9월 18일철십자 훈장 2급1914년판
1916년 10월 30일철십자 훈장 1급1914년판
1916년 10월 25일로열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기사 십자장 (검 부착)
1915년 6월 24일군사 공로 훈장 3등급 (전쟁 무공 훈장 부착)오스트리아-헝가리
1917년 2월 9일철관 훈장 3등급 (전쟁 무공 훈장 부착)오스트리아
1917년 8월 3일군사 공로 훈장 2등급메클렌부르크-슈베린
1917년 9월 19일한자 십자 훈장함부르크
1918년 1월 30일한자 십자 훈장브레멘
1918년 1월 10일체링거 사자 훈장 기사 1등급 (검 부착)바덴
1918년 1월 25일왕관 훈장 기사 십자장 (검 부착)뷔르템베르크
1918년 4월 1일푸르 르 메리트
1918년 8월 2일군사 공로 훈장 지휘관 십자장불가리아
1920년근속 표창
1921년 4월 15일슐레지엔 독수리 훈장 1, 2등급
1939년 9월 12일국방군 장기 근속 표창 1등급 및 4등급 (참나무 잎 추가)
안슐루스 메달
주데텐란트 메달
1939년 6월유고슬라비아 왕관 훈장 1등급유고슬라비아
1939년 9월 22일철십자 훈장 부장 1, 2등급
1940년 8월 27일이탈리아 왕관 훈장 대십자장이탈리아
1942년 7월 29일용맹 공훈 훈장 3등급루마니아
1942년 9월용맹 공훈 훈장 1등급루마니아
1942년 11월 27일헝가리 왕국 공로 훈장 대십자장 (검 부착)헝가리 왕국
1939년 9월 30일철십자 기사 십자장대장 및 북부 집단군 사령관
국방군 군보 언급 (1941년 8월 7일, 1941년 9월 19일, 1941년 10월 18일, 1942년 5월 30일)


참조

[1] 비디오 Battle of Russia Universal Pictures Video 2005-05-02
[2] 서적
[3] 서적
[4] 서적 Men of Barbarossa: Commanders of the German Invasion of Russia, 1941 https://books.google[...] Casemate 2023-12-15
[5] 서적 Who Voted for Hitler?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서적 Current Biography 1942
[7] 웹사이트 Fedor von Bock 1880–1945 https://www.dhm.de/l[...] 2024-02-10
[8] 웹사이트 Die Besetzung des Sudetengebietes 1938 https://www.dhm.de/l[...] 2024-02-10
[9] 잡지 Hitler/Jaeger File https://web.archive.[...] 2009-04-14
[10] 서적 The War Aims and Strategies of Adolf Hitler
[11] 웹사이트 Ribbentrop text justifying war against Soviet Union https://www.upi.com/[...]
[12] 서적 The Other Side of the Hill https://archive.org/[...] Pan Books
[13] 비디오 Blood and Steel: The Russian Front Cromwell Productions Ltd 1999-01-03
[14] 서적 With Paulus at Stalingrad Pen and Sword Books Ltd.
[15] 학술지 'Did Kiwis Kill a Field Marshal?' NZ Military Historical Society 2021-03
[16] 서적 The Third Reich at War
[17] 서적 ヒトラー暗殺計画 原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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